00:00
00:00

10편. 고구려 VS 수나라 전쟁


제1장 임유관(臨愉關) 전쟁

 

고구려· 수(隋) 전쟁의 원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충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이는 오래된 공리와 정리로 여겨진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많은 부족들이 서로 대립했지만, 대부분 미개한 유목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세력을 일시적으로 가졌다 하더라도 문화적 기반이 없어 결국 뿌리 없는 나무처럼 쉽게 붕괴했고, 다시 재건하기 어려운 운명을 맞았다. 이에 반해,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 온 정착민족으로는 중국과 조선이 있었다. 동아시아 고대사에서 두 나라가 양대 세력으로 자리 잡았기에, 필연적으로 만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충돌이 없던 시기라면, 서로 내부에서의 혼란과 불안으로 인해 각각 내부 문제 해결에 몰두하던 때였을 것이다.

고대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고구려 건국 이후 조선은 여전히 봉건 상태였고 여러 나라 간 침략이 반복되었기에 외부로 세력을 확장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한나라는 통일 후 안정된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외정을 펼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를 향한 한나라의 공격은 빈번했다. 고구려의 태조와 차대 대왕 시절, 비록 조선 내 모든 세력을 통일하지는 못했으나 국력은 매우 강성하여 국내에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로 인해 한나라를 공격해 요동을 점령하고 직예와 산서 지방까지 그 세력권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후 왕위 쟁탈전을 겪으며 내란이 거듭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발기가 요동 지역을 공손도에게 넘기며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인구가 가장 밀집된 비옥한 땅을 잃고 쇠약해졌다.

고구려는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북방의 위나라와 모용씨의 연나라 등 중국 주변 세력에 도전하는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부상하며 고구려와 비슷한 수준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고국양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은 서북쪽으로는 글안까지 정복하고 열하 지역을 포함한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며 국력을 일으켰다. 이어 장수왕은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기르고 인구를 늘리며 국력을 팽창시켜 마침내 중국과 견줄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백제, 신라 등 네 나라가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를 견제했고, 이에 따라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 이후 남쪽 통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중국 역시 내부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분열 상태였기에 북방의 외침에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이로 인해 위나라의 척발씨와 주나라 우문씨의 고구려 침략 등 일시적인 충돌은 있었으나, 지속적인 대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6세기 말경, 상황은 바뀌었다. 우문씨를 몰아낸 수나라의 문제 양견은 진나라를 병합하며 중국을 통일하고 강대한 제국을 세웠다. 수나라는 내부적으로 선비족 출신 황실과 귀족들이 이미 중국화된 상태였고, 이에 힘입어 주변 민족들을 깔보는 태도를 취했다.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토욕혼마저 약해져 수나라에 예속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동쪽의 고구려만이 강력한 힘으로 저항했다. 이로 인해 자존심 강한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의 존재를 참아 넘길 리 없었고, 이것이 결국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오랜 세월 동안 풀리지 않는 앙숙 관계였으나, 갑작스럽게 사돈 관계로 맺어지면서(참조: 제9편 제1장) 서로 화친하게 되었다.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고구려를 적대시하여 각각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고, 때때로 고구려 내부 상황의 약점을 수나라에 알려 수나라 황제와 신하들의 야욕을 부추겼다. 이것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두 번째 이유였다.  

나중에 신라가 당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반독립적인 상태로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과 연개소문의 강력한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고구려가 수나라에 멸망했다면, 백제와 신라 역시 수나라의 속현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며 신라와 백제가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을 덮게 되는 것이다.


수문제(隋文帝)의 모욕적인 언사의 국서(國書)와 강이식(姜以式)의 북벌 주장

기원후 597년은 고구려 영양왕 8년에 해당하며, 이 시기는 수나라 문제(문황제)가 진(陳)나라를 병합해 중국을 통일한 지 17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 수나라는 풍년과 안정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고구려와의 힘 대결을 도모하며 도발적인 문서를 보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며 모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짐은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데,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의 통치를 맡긴 것은 교화를 펼쳐 각자의 천성을 다할 수 있도록 둔 것이다. 왕이 해마다 조공 사절을 보내니 비록 번국의 신하처럼 여길 수는 없지만 그 진심이 부족하다. 왕은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아야 마땅하건만, 왕은 오히려 말갈을 공격하고 글안을 억압하여 자신의 신첩으로 만들고, 짐에게 내조하는 것을 방해하여 의를 존중하는 자들도 이를 싫어하게 만든다. 이 얼마나 해로운 일인가? 짐의 관청에는 능숙한 장인이 많으니 왕이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요청하기만 하면 되는데, 왕은 도리어 몰래 재산을 사용하고 소인배를 동원하여 병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수리하였으니, 이는 대체 무엇을 위한 행동인가?

고구려는 비록 영토가 좁고 백성이 적더라도, 짐이 그 마음만 먹으면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관리를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왕이 진정으로 마음을 고쳐 행실을 바로잡는다면 짐에게는 좋은 신하일 것이니 굳이 다른 사람을 임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요수(遼水)가 넓다 하여도 장강(長江)에 견줄 수 없으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하여도 진국(陳國)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만약 짐이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 없이 오직 왕의 잘못만을 꾸짖는 데 그치고자 한다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아직도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길 바랄 따름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서신이 평원왕 32년(기원후 590년)에 보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 개황 17년에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평원왕 32년은 개황 17년과 일치하지 않으며, 개황 17년은 이미 평원왕이 사망한 지 7년이나 지난 후이다. 이는 삼국사기가 연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며, 수서에서는 왕의 대를 혼동하여 오류를 남긴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이래로 이웃 나라 군주의 사망 소식은 일반적으로 보고 다음 해에 기록되곤 했으며, 이러한 관습으로 인해 연도를 잘못 기재하는 일이 잦았다. 삼국사기는 평원왕과 영양왕에 관한 연대를 고기의 기록에 따랐으나 수서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평원왕 32년에 이 글을 기록해 인물 관계와 연대에서 모두 미스를 남겼다.

영양왕은 수나라 문제가 보낸 무례한 서신에 크게 분노하여 여러 신하들과 회답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강이식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오만무례한 글에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응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전쟁을 제안했다. 이에 영양왕은 그의 의견을 따라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임명하고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출정하도록 했다. 먼저 예군(濊軍, 수서에는 말갈로 기록됨) 1만 명으로 요서 지역에 침입해 수나라 군을 유인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산둥 지역에 상륙해 기습 공격하도록 하며 양국 간 첫 전쟁이 시작됐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삼국사기가 주로 수서(隋書)만을 발췌하여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동운해에서는 강이식을 살수전쟁 당시 병마도원수로 서술하고 있으며, 반면 서곽잡록에서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투의 병마원수로 기록하고 있어 두 책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수전쟁 당시 왕의 동생 건무가 해안을 담당하고 을지문덕이 육상을 책임졌으니, 병마도원수로서 강이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서곽잡록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임유관(臨愉關) 전쟁

이듬해 고구려 군은 요서 지역을 침입하며 요서총관 위충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임유관 밖으로 물러났다. 이에 수나라 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한왕 양양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주나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해 해상으로 이동하게 했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실제로는 양식을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로 진입해 양양의 군량을 보급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고구려 장수 강이식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들을 맞아 싸워 배를 격파했다. 이어 군중에 명령을 내려 성채를 지키며 나서서 싸우지 않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수나라 군은 양식 부족과 6월 장마, 전염병으로 인해 다수의 병력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지며 패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추격한 강이식은 대부분의 적군을 섬멸하고 많은 군기를 노획하며 개선했다.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에는 양양의 군대가 장마와 전염병에 시달렸고, 주나후의 함대는 풍랑을 만나 퇴각했으며, 병력의 90%가 패사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고구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항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치욕적인 패배를 숨기려는 춘추필법에 따른 서술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임유관 전투뿐 아니라 이후 살수 싸움 기록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유관 전투 이후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못했다. 결국 양국은 휴전 조약을 맺고, 상업 무역을 재개하며 10여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이어갔다.

 

제2장 살수(薩水) 전쟁

 

- 고구려 · 수(隋) 제2차 전쟁의 원인과 동기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남진 정책을 통해 중국 서북 지역과는 친교를 맺고,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대상으로 군사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중국에 수나라가 등장해 남북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이를 경계하며 신라와 백제를 정복해 조선을 통일하려는 의지로 남쪽으로 군사를 자주 움직였다. 반면, 신라와 백제가 동서 간 전쟁으로 갈등을 겪어 화합의 여지 없이 매년 충돌했고, 여기에 더해 고구려의 침략까지 받으며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두 나라는 결국 각각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고구려에 대한 군사 행동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임유관 전투에서의 패배를 경험한 뒤 고구려를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을 인지하고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 후 문제의 사망과 양제의 즉위로, 수나라 전국에 풍년이 이어져 경제적 여건이 좋아졌고 창고에 곡식이 풍부해졌다. 양제는 순행을 즐기며 대운하를 건설하고 주변국들의 조공을 받아들여 제국의 위상을 과시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서북의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하며 인구와 군사의 강성함으로 수나라와 대적하려 하자, 양제는 이를 경계하면서도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마음을 점차 키워갔다.

607년, 양제는 돌궐 계민가한의 장막을 찾아갔고, 당시 돌궐은 수나라에 신하를 자처하면서도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해 양쪽에 조공을 보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를 알게 된 양제는 계민가한을 압박해 고구려 사신과 대면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제의 측근 배구가 그를 부추겨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양제는 고구려 왕에게 입조를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시 직접 군사를 이끌겠다는 위협을 전했다. 

고구려 조정이 이를 어떻게 논의하고 대응했는지는 기록에 빠져 있지만, 배구는 동번풍속기라는 책을 통해 고구려의 경관과 문화적 가치를 찬양하면서 양제의 정복 욕망을 부추겼다. 결국, 이로 인해 명분 없는 거대한 동방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까지도 동양 역사에서 유례없는 규모였다.


- 수양제(隋煬帝)의 침입과 그 전략

기원후 611년 6월, 수나라의 양제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조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이듬해 정월까지 탁군(지금의 직예성 탁현)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유주총관 원홍사에게 동래(지금의 연태 해구)에서 병선 300척을 제작하게 하였고, 4월에는 강남과 회남 지역에서 수군을 증강하기 위해 수수(水手) 1만 명, 노수(弩手) 3만 명, 영남 지역에서는 배랍수(排拉手) 3만 명을 징발했다. 5월에는 하남과 회남 지역에 조서를 내려 병거(兵車) 5만 대를 제작하게 하여 군사와 무기, 군막 등을 운반하도록 했다. 이어 7월에는 강남과 회남의 민부(民夫)와 배를 동원해 여양창과 낙구창 등지의 곡식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했는데, 당시 강과 바다에는 배가 천여 리에 걸쳐 늘어서고, 육지에서는 수십만 명의 징발된 일꾼들이 물자를 나르는 소리로 밤낮이 소란스러웠다.

이듬해 정월, 양제는 탁군에 도착하여 전체 군사를 조직적으로 지휘했다. 모든 군사는 좌우 각각 12군단, 총 24군단으로 나뉘었다. 각 군단은 대장과 아장을 한 명씩 배치하고, 기병은 40대(1대는 100인으로 구성), 보병은 80대로 나누었다. 기병은 10대씩 한 단을 이루어 네 단으로 나누었고, 보병은 20대씩 한 단으로 네 단으로 나누어 배치했다. 치중병과 산병도 각각 네 단으로 나누어 보병 사이에 끼워 배치했다. 각 단은 갑옷과 투구, 깃발의 색깔을 달리해 통일성을 가졌으며, 이동 및 정지 시의 질서도 정연했다.

각 군단은 하루에 40리씩 전진하며 영(營)을 세웠고, 전체 군단이 출발하는 데는 무려 40일이 걸렸다. 군대의 선두와 후미가 맞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으며, 북과 뿔피리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깃발은 960리에 걸쳐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어영군이 출발했는데, 이들이 차지한 거리 역시 약 80리에 달했다. 정규군의 숫자는 약 113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약 200만이라 불렸고, 이를 지원하는 인원까지 합치면 약 4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동원이었다.

수서(隋書)에 의하면 양제의 출정 명령에 따라 좌군은 누방, 장잠, 명해 (현재 강화),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현재 함경도, 훈춘 지역), 낙랑 등을 경유했고, 우군은 점선, 함자, 흔미, 임둔(현재 강원도),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현재 강원도), 대방, 양평 등의 노선을 따라 평양에서 집결토록 했다. 하지만 평양에 모이라는 군사 작전에서 일부 경로가 현재 함경도나 평양 이남 지역과 관련된 점을 감안하면 당대의 지리적 이해와 군사 전략적 의도가 혼재되어 복잡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은 여러 군단의 움직임을 기록하며 병력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우효위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로,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로, 우무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로, 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각각 출병했다. 이들은 모두 압록수 서쪽에서 집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낙랑과 현도 지역은 한나라 이래로 북낙랑과 북현도가 요동에 임시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옥저가 압록수 서쪽에 위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해당 지명이 고구려 본래의 것이 아니라 임의로 명명된 가능성이 있어, 각 군단의 행군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전쟁의 전후 과정을 분석해 보면, 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 군단은 수륙 양면으로 구분했으며, 육군은 다시 두 파로 나뉘었다. 첫 번째 그룹은 어영군을 포함한 10여 개 군단으로, 양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수를 넘어 요동 지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려 했다. 두 번째 그룹은 우문술이 총지휘를 맡고 우중문이 참모로 참여한 9개 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요수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목표로 침공하게 했다.

수군 또한 수만 명 규모로 편성되어 좌익위대장군 겸 수군총관 내호아와 부총관 주법상이 지휘를 맡았다. 이들은 식량을 실은 배를 이끌고 해상으로 진입해 대동강을 통해 우문술의 육군과 합류한 후, 평양 공격을 지원하도록 계획되었다.

고구려는 태조왕 시절 왕자 수성이 한나라 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한 전례가 있었다. 이후 수성이 사용한 전략은 고구려가 북방 침공을 방어하는 데 주요 전술로 자리 잡았고, 이를 활용한 인물들은 대부분 승리했다. 이 때문에 북방의 적들도 이러한 전략을 두려워했다. 양제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육군은 이동 중 먹을 식량만 휴대한 채 작전을 추진했다. 실제 보급은 요동과 평양 지역에 도달하는 수군에 의존하여 양식을 운송받기로 했으며, 두 성을 포위한 후 지구전으로 고구려의 항복을 이끌어내려는 계획이었다.


- 고구려의 방어와 그 작전계획

후세에 살수대전을 논할 때, 흔히 이를 을지문덕 한 사람의 전략으로 치부하거나, 그가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백만의 수나라 대군을 격파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가 망할 당시에도 그들의 상비군은 30만에 이르렀으니, 영양왕 시절과 같은 전성기에는 오히려 이보다 더 많은 병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광개토왕 비문에서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출정했다"는 기록이나, 양제의 고구려 정벌을 알리는 선전 조서를 통해 고구려에 이미 수군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수군의 규모는 대략 수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당시 30만이 넘는 병력 중 일부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약 20만 명 가량은 수나라와 맞서 싸운 주력 병력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주요 지휘 체계에서는 수륙군의 대원수로 왕의 아우 건무가 있었고, 육군의 원수로는 을지문덕이 역할을 맡았다.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륙 방어 모두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에 따라 방어 전략은 주로 "먼저 지키고 이후에 공격한다"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육상병들은 백성들에게 곡식을 징발하여 성 안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고, 수군 역시 요새화된 항구나 안전지대로 물러나 전면적 충돌을 피했다. 이처럼 방어를 중심으로 수나라 군사의 보급로 차단과 허기를 유도한 뒤 효과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치밀한 전법이 쓰였다.


- 고구려군의 패강(浿江) 승전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깊숙이 유인하려는 전략으로 요하 서북쪽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사를 철수시키고 요하를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해당 해 3월, 수나라 군대가 요하에 이르러 서쪽 연안에 수백 리에 걸쳐 진을 치게 되었다. 수나라 군대는 마치 벌떼처럼 혼잡하게 모여들었고, 군사 장비와 군기들은 햇빛을 반사하며 화려하게 빛났다. 

수나라 군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용장이라 불리던 선봉 맥철장은 부교를 설치해 동쪽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여러 장수들에게 이를 맡아 치게 하였다. 그 결과 맥철장과 그의 병사 수십 명, 그리고 군졸 만여 명을 베어내고 부교를 끊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응하여 수나라 군에서 잠수와 수영에 능한 자들이 나서며 다시 다투어 부교를 복구했다. 을지문덕은 이에 따라 미리 설정한 계획대로 일부러 패퇴하는 척하며 퇴각했다. 

수양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전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왔다. 그는 어영군과 좌익위대장군에게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도록 하고, 좌둔위대장군 토우서를 비롯한 10여 개의 군단으로는 부근의 성들을 공격하게끔 명령했다. 한편,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등 9개의 군단은 을지문덕을 추격하며 평양으로 향했다. 

이와 별도로, 수나라의 우익위대장군 내호아는 강회 지역의 수군 10만 명을 이끌고 양식을 실은 배를 호위하며 동래(지금의 연대)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창해를 건너 대동강 어귀로 진입했는데, 이에 고구려의 장수 왕제 건무는 수군 장병들을 은밀히 후미진 항구에 숨겨두었다. 또 평양성 주변 민가에서는 재물을 밖에 내놓으며 수나라 군대가 안심하고 상륙하도록 유도하였다. 

내호아는 정예병 4만 명을 선발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 아래로 돌격했으나, 약탈에 열중하면서 군대의 대오가 흐트러졌다. 이를 놓치지 않은 왕제 건무는 결사대 500명을 선발해 성곽과 빈 절에서 돌격시키며 적의 대오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고, 숨겨져 있던 고구려의 수군도 일제히 나서며 함께 수나라 군대를 섬멸했다. 결국 수나라 병사들은 강 어귀에 몰리며 혼란 속에서 배를 서로 점령하려다 짓밟혀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끝내 양식이 실린 배는 모두 바다 속으로 침몰하였고, 내호아는 간신히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

이에 따라 양식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평양성에 침입했던 우문술 등의 대군 역시 물자 부족으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로 고구려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공로 면에서 본다면 왕제 건무의 활약이 을지문덕보다 앞선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흔히 을지문덕만 기억하고 건무의 공적은 잘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사마온공의 *통감고이*에서는 "만약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않았다면 우문술이 살수 대첩에서 패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는 충분히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 고구려군의 살수(薩水) 전승

을지문덕은 요하에서 병력을 철수하며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 항복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변장해 수군 진영에 잠입했다. 그는 적의 내부 사정을 면밀히 관찰한 뒤 돌아왔다. 그러나 수나라 장수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의 위풍당당한 자태와 건장한 체격에 경악하며, 아마도 고구려의 대왕이나 고위 관직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후 그를 잡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다시 만나기를 청했으나, 을지문덕은 이미 패강에서 고구려의 승전 소식을 접하고 수군의 피로와 굶주림을 눈치챘다.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그는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함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황급히 철수하면서도 미끼 전략으로 수군을 유인했다. 길목마다 요새를 이용해 간헐적으로 교전하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는 전략을 반복해 하루 동안 일곱 차례나 물러났다. 우문술 등은 고구려 군이 별 위험하지 않다며 크게 기뻐했고, 이 기세를 타고 살수를 건너 평양까지 진출했다.

평양성에 도착한 수군은 예상 밖의 적막에 당황했다. 성 내부와 외부 모두 조용하기만 했고, 사람이나 짐승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의아해한 우문술은 성문을 열게 하려고 사자를 보냈다. 이에 성 안에서는 “곧 항복할 예정이니 땅과 인구 관련 문서를 정리 중이다. 성 밖에서 닷새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에는 전보와 같은 신속한 통신 수단이 없었기에, 우문술과 수나라 군은 내호아 부대가 패전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변에 진을 쳤다. 하지만 군사들은 식량 부족으로 약탈을 시도했으나, 이미 주변 민가는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닷새가 지난 후에도 고구려 측의 움직임이 없자, 열흘째 되는 날 우문술은 결국 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내 성 위엔 고구려 깃발이 치솟았고, 화살과 돌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이에 더해 을지문덕은 통역을 통해 “너희 양식 배가 바다에 가라앉아 보급은 끊겼고, 평양성은 높고 견고해 넘을 수 없다. 이제 어찌할 셈인가?”라며 심리전을 펼쳤다. 동시에 포로로 잡은 수나라 병사들의 도장과 깃발까지 내던짐으로써 내호아 부대의 패배 소식을 넌지시 알렸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수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다. 결국 우문술 등은 퇴각을 명령하며 물러가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이에 대비해 미리 모래주머니로 살수 상류를 막아 물길을 조정했고, 정예 군사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퇴각하는 적군을 뒤쫓았다.

살수 대첩에서 수나라 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었다. 강을 건널 배가 없던 우문술과 그의 군대는 물의 깊이를 알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고구려의 승려 일곱 명이 물속으로 들어가며 "이 물은 무릎에도 차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강을 건넜다. 이를 본 수나라 군은 환호하며 경쟁적으로 강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이 중류에 다다르기도 전에 상류에서 고구려군이 모래주머니로 막아둔 물을 풀어버렸다. 갑자기 강물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흐름이 사나워졌고,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수나라 군은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했다. 대부분이 칼이나 화살에 맞거나 물에 빠져 숨졌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조차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약 450리를 달아나 압록강을 넘어 요동성으로 향했다. 이때 우문술이 이끈 30만 5천 명의 대군 중 겨우 2천7백 명만이 생존했으며, 생존율은 백 명 중 한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무기, 물자 등 수만 대의 수레가 모두 고구려의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 고구려군의 오열홀(烏列忽) 대첩

양제의 어영군과 기타 10여 군단에 이르는 수십만 병력이 오열홀과 요동 각지의 성을 공격했으나,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더불어 3월부터 7월까지 약 4~5개월간 고구려 병사들의 화살에 맞아 죽은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성 아래에는 해골이 산을 이루었다. 게다가 식량 보급이 끊겨 장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결국 우문술 등이 패하여 퇴각하는 상황을 목격하자 더 이상의 전투 의지를 잃었다. 그러나 양제는 여전히 마지막 희망을 품고 모든 군대를 오열홀 성 아래에 집결시켰으나, 을지문덕의 반격으로 대패하여 다수의 병사와 말이 전사하고 무수한 물자를 빼앗겼다.

훗날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가 이곳의 경관을 허물고 백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할 당시, 당의 장수 울지경덕이 세운 것이라고 잘못 전해오고 있다. 실제로 수나라의 24개 군단과 수백 명의 병력이 전멸했으며, 살아남은 호분낭장 위문승과 일부 패잔병 몇 천 명만이 양제를 보호하며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는 살수에서 우문술이 패배한 것은 기록하면서도, 오열홀에서 양제가 패전한 사실은 서술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지배층의 불명예를 감추기 위한 춘추필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춘추필법을 이해해야만 중국 역사의 숨겨진 진면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하를 건너 약 OO리 지점에 이른다면 발착수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름은 '수'라 하지만, 이는 강물이 아니라 요동 지역에 널리 알려진 큰 진창으로, '요택'이라고도 한다. 당태종이 남긴 요택 매골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수나라 군사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체로 고구려 군사의 추격 때문이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패강, 살수, 오열홀의 세 주요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가장 큰 공적은 패강 전투이고, 그 다음은 살수 전투, 마지막으로 오열홀 전투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해 '살수 대첩'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존 기록에 따라 그대로 사용한다.


제3장 오열홀(烏列忽)·회원진(懷遠鎭)에서의 전쟁과 수(隋)의 멸망

 

수양제(隋煬帝)의 재침(再侵)과 오열홀(烏列忽) 성주(城主)의 방어

수의 양제는 전투에서 패배 후, 그 책임을 우문술 등 장군들에게 돌려 그들을 파면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듬해 정월, 전국의 군사와 말을 동원해 탁군으로 소집하였다. 요동의 옛 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비축하면서 "패전의 원인은 군량 부족 때문이지 장군들의 잘못이 아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전국에 알렸다. 그러고 나서 장군들을 복직시킨 뒤,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작년에 요동을 제압하지 못하고 곧바로 평양을 공격한 것을 실책으로 판단하며 전략을 수정했다. 새 계획은 먼저 오열홀을 함락한 뒤, 지역에 따라 각 주군을 평정하며 궁극적으로 평양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수나라는 대패 이후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군대는 대폭 줄어든 상태였다. 백성들은 쇠약해진 나랏살림과 무리한 군사 징발로 인해 불만이 극에 달했고, 반란을 기도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때 '무향요동낭사가'라는 민중가요가 유행하며 시대 상황을 반영했다. 

하지만 양제는 이러한 민심과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성들의 재물을 징발해 군량을 확보하고 남자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몇 개월간의 교련 후 그는 요동으로 진군하였으며, 우문술과 이경 등 장수들에게 고구려의 지원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양제는 황제의 직속군을 이끌고 직접 오열홀을 공격했다. 

당시 오열홀의 성주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그는 지혜롭고 용맹하며 침착한 인물로 평가된다. 성 안의 병사들 역시 많은 전투를 경험한 유능한 용사들이었다. 양제는 성을 함락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동식 공성탑(비루)을 세우고, 높은 사다리(운제)를 올리며, 땅굴(지도)을 파고, 흙산(土山)을 쌓는 등 다양한 전술을 시도했지만, 성주는 매번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쳐 싸움은 수십 일간 대치 상태에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 군사는 막대한 희생을 겪었다.

그 와중에 수의 동도수장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급해진 양제는 무기와 물자, 성 공격 장비 등을 모두 버리고 밤 이경에 장군들을 소집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 소식은 결국 오열홀의 성주에게 발각되었고, 철수하는 수나라 후군은 고구려 군사의 기습 공격으로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수양제(隋煬帝)의 세 번째 침략과 노수(弩手)의 저격

양제는 비록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국력이 쇠퇴하고 백성들 사이의 원망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다시 국내의 병력을 소집하여 회원진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전쟁 경험으로 인해 병사들 사이에서는 죽음을 예상하며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고, 이미 반란이 일어난 지방은 징병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불리해지자, 양제는 전쟁을 중단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할 경우 온 나라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반란 진압 역시 어려울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는 고구려에 조건을 내걸며 휴전을 시도했는데, 그 조건은 반역자 곡사정의 송환이었다. 곡사정은 양현감의 일당으로 고구려로 투항했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 내부에서는 국론이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중국에 유화적인 태도를 가지며 후한 예물을 통해 화평을 유지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거 중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여러 해 동안 전쟁이 이어졌으니, 이제부터는 강경책을 버리고 화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쪽은 신라와 백제는 지형적으로 험준해 공격이 어려운 데다 주민들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 특성이 있지만, 중국 대륙은 넓고 평탄하며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단 한곳에서 승리하면 다른 지역까지 동요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장수왕의 북수남진책이 애초에 잘못된 전략이라며, 남쪽은 방어만 하고 정예병을 뽑아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을 따르자면 설령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승리 가능성이 높고, 이후 국내 통치를 안정화한 뒤 인재를 등용하면 중국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첫 번째 견해는 왕의 동생 건무를 중심으로 많은 호족들이 주도했으며, 두 번째 입장은 을지문덕이 이끄는 장군들이 찬성했다. 두 사람 모두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워 신망이 높았던 만큼, 각 세력의 힘은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의견에 찬동했지만, 고구려는 호족 공화적인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어 왕도 건무파의 의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양제가 곡사정 송환 조건으로 화의를 제안하면서 건무파가 우세해졌다. 결국 고구려는 망명한 곡사정을 송환하는 것을 수락하며 사자를 보내 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수행원으로 변장한 한 장수가 소뇌를 품고 사자를 따라가 양제의 가슴에 화살을 쏘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의를 깨뜨리거나 곡사정 송환 자체를 중단시키지는 못했지만, 양제에게 충격을 안기고 고구려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화살을 맞은 양제는 부상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차 병약해졌다. 그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나라 안 정세마저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 결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암살당했고, 수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정복 선생은 고구려 영양왕 시기의 살수대첩을 논평하며, 그 전쟁의 성과로 수나라 양제가 아버지를 죽인 죄에 대해 성토하고, 을지문덕 장군의 지도 아래 수나라를 정복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양제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설은 진위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이는 수나라 궁중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고구려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상잡록*에는 이 전쟁 이후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북벌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안정복 선생의 저서인 *동사강목*에는 이를 싣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비사의 내용을 정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같은 정사들은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서술된 기록이므로 중국과의 전쟁에 관해서는 오직 중국 측 기록만 인용했다. 따라서 비사의 기록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담은 중요한 자료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본서에서는 이를 발췌하여 수록했다.

다른 화

목록보기